II. 전시기획
3. 전시주제 및 구성
그 동안의 미술이 왕족, 귀족 등 가진 자를 위한 미술이었다면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미술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정치, 경제적인 성장을 들 수 있다.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들어와 ‘황금시대(Golden Age)’라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냈고 해상무역을 통해 자유도시국가들이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경제적인 부가 왕이나 귀족이 아닌 시민계급에게로 돌아가게 되었고 다른 유럽지역에 비해 신앙과 사상의 자유가 존중됨으로써 많은 유럽인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다양한 문화적인 영향을 흡수하면서 시민문화가 융성하였고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미술의 후원에 있어서는 교회, 궁정, 귀족 계급의 후원이 줄어들고 시민들이 작품의 주 구매자가 되면서 일상적인 주제들이 선호되었다. 즉 네덜란드인들의 삶과 환경을 묘사하는 사실적인 경향의 정물화, 장르화(일상장면), 풍경화 등이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또한 수요가 많아서 각 장르마다 다양하고 전문화된 화풍이 발전할 수 있었다. 가령 정물화에서도 아침식탁 정물, 꽃 정물, 바니타스(인생무상) 정물 등, 풍경화의 경우에도 해양화, 강풍경, 건축화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또한 주요 도시마다 지방색을 살린 화풍들이 발전하고 있어 네덜란드 회화는 어느 나라와도 견줄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독창성과 질을 확보하게 되었다.
전시구성은 네덜란드 및 벨기에의 특색있는 화풍이 발달했던 도시를 중심으로 구분하였다. 마치 관람객들이 지도를 따라서 도시를 유람하듯 각 도시의 회화를 접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다. 즉 관람객은 하를렘, 델프트, 레이든, 헤이그, 암스테르담, 앤트워프(플랑드르 지역)의 순서로 작품 순례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위의 도시들은 각기 경제, 문화적 기반의 차이와 대표작가에 의한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스승과 제자라는 밀착된 관계를 통해 그 특성이 계승, 발전되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작가들은 한 도시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도시로 이동을 하면서 다른 작가들과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그 지역적 특성이 한 작가의 개성을 결정짓는 전부는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성장하는데 기반이 되었던 지역보다는 출품작이 제작된 시점을 중심으로 지역을 안배하였다.
하를렘은 17세기 초 네덜란드 회화발전에 있어 중심이 된 도시였다. 네덜란드의 특색있는 미술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된 곳으로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분야에서 수준높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그 중 초상화가 프란스 할스의 영향은 이 지역에서 지배적이었다. 앤트워프에서 아버지의 직물산업 때문에 하를렘으로 이사했던 그는 활달하고 즉흥적인 기법에 의해 작품에 자연스런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성격묘사에 있어서도 예리함을 보여주고 있다.
프란스 할스의 작품세계는 동생인 디르크 할스(Dirck Hals)와 아드리안 판 오스타더, 이삭 판 오스타더(Isaack van Ostade)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네덜란드 미술에서 중요한 장르인 정물화와 풍경화에서도 독특한 특징이 나타난다. 그것은 단색조의 색과 단순한 구성이 이 두 장르에서 공통되게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17세기 초반에 등장했던 것으로 정물화가인 피터 클라스(Pieter Claesz.)과 빌럼 헤다(Willem Heda)의 상징성이 풍부한 단색조의 바니타스 정물과 아침식탁 정물로 보여진다. 풍경화로는 네덜란드 사실주의 풍경화를 들 수 있는데, 하를렘 출신으로 나중에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했던 야콥 판 롸이스달과 헤이그의 얀 판 호연의 작품이 그러하다.
델프트는 그다지 큰 문화적인 영향이 없었던 지역으로 조용한 매력을 보유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곳에서는 어느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인 화풍이 발전할 수 있었다. 이 화파의 특징은 인물이 있는 장르화를 위주로 빛을 민감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화가로 얀 베르메르와 피터 드 호흐(Pieter de Hooch)를 들 수 있는데 이번 전시에는 베르메르의 작품이 출품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호흐의 작품을 통해 델프트화파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다. 호흐는 부유한 가정을 배경으로 건축적 요소와 일상 장면들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배치하고 있으며, 주로 밝고 분명한 색조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인물과 주변 배경을 통해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따뜻하고 친밀하며 평화스럽다. 또한 제자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질감을 처리하는 세련된 솜씨에서 호흐의 영향을 읽을 수 있는 코르넬리스 드 만(Cornelis de Man)의 작품도 출품되었다.
교회인테리어와 초상화를 결합한 <로테르담의 성 라우렌스 교회의 내부>에서 건물기둥과 바닥에 떨어지는 빛의 처리가 매우 뛰어나다.
레이든에서는 장르화를 중심으로 정밀화풍의 작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던 헤리트 다우(Gerrit Dou)는 렘브란트가 레이든에 머물렀을 시기에 그를 통해 빛의 표현을 터득했다. 그후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하면서 붓질이 안보일 정도로 세밀한 기술을 구사하게 된다. 빛의 미묘함을 표현하고 그림에 벽감의 형태를 도입하는데 이것은 레이든의 화가들 특히 프란스 판 미리스(Frans van Mieris the Elder), 빌럼 판 미리스(Willem van Mieris)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장르화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얀 스테인의 작품 역시 즐거운 세부묘사로 흥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머러스한 그의 작품은 마치 한 편의 대중 연극을 보는 듯하다. 작은 작품에 보이는 기술적인 완벽함과 뛰어난 색 표현은 그의 명성을 확인시켜준다.
헤이그는 13세기 이래로 백작들의 거주지가 있었고, 총독궁정, 군사본부, 외교관이 머무는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이 도시는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며 역사화와 초상화가 제작되었다. 궁전에 걸렸던 아브라함 블루마르트(Abraham Bloemaert)의 작품은 에디오피아의 설화를 바탕으로 모험과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 장식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초상화로 카스파르 네처(Caspar Netscher)가 그린 두 점의 부부초상을 들 수있다. 네처의 출생은 명확하진 않으나 프랑스를 여행한 바 있으며 헤이그에 정착한 후에는 프랑스식의 작고 우아한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헤리트 베르크헤이더(Gerrit Berckheyde)가 마우리츠하위스 건물이 내다보이는 풍경을 배경으로 사냥가는 장면을 그린 작품 또한 전시되어 17세기 마우리츠하위스 주변의 풍경을 가늠케 한다. 종교적 대립이 심하지 않은 도시였기 때문에 카톨릭교도로써 이곳에 이주하게 되었다는 얀 판 호연의 작품은 인간의 눈높이에 맞춘 낮은 지평선과 화면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하늘을 표현하는 등 전형적인 네덜란드 풍경화를 보여주고 있다.
암스테르담은 17세기 국제적인 항구로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플랑드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작가들이 이곳에 모여들면서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장르화, 역사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작품판매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암스테르담은 17세기 중반 이후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화가라면 우리는 두말할 것 없이 렘브란트를 꼽을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그의 예술세계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빛에 의한 뛰어난 명암처리는 인간의 정신적 깊이감과 숭고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20대의 작품 <웃고 있는 남자>와 30대의 작품 <깃달린 모자를 쓴 남자>, 후반기작으로 전해져오는 <노인 습작>이 출품되어 렘브란트의 실력을 가늠케한다. 그리고 풍경화로, 환상적이고 황량한 계곡 등 우수에 찬 분위기를 자아내는 롸이스달의 후반기 작품과 그의 제자 메인더르트 호버마(Meindert Hobbema)의 작품이 있다. 또한 로마의 유적을 그려넣고 섬세한 빛 묘사로 인기를 모았던 이탈리아풍 풍경화가 얀 보트(Jan Both)의 작품도 출품되었다.
그리고 앤트워프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지역은 네덜란드와는 경제, 문화적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던 곳이다. 당시에 이곳은 스페인의 치하에 있었고 카톨릭이 지배적인 곳이어서 사실주의 경향의 회화보다는 고전적인 바로크 미술이 우세하였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작가는 바로크 미술을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루벤스였다. 그의 작품은 따뜻한 색채로 주위공간을 통일시키고 이야기의 극적효과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젊은 여인의 초상>, <로마의 승리:로마를 찬양하는 젊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생기있는 붓터치와 인물표현 그리고 여러 요소들이 통합되어 표현된 구성에서 그의 작품세계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루벤스의 작품은 플랑드르 지역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미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가 배출한 대표적 화가로 안소니 반 다이크와 프란스 스네이더스(Frans Snijders)를 들 수 있다. 반 다이크는 영국 찰스 1세의 궁정화가로 영국 귀족초상화의 전통을 세웠던 화가이며 이번 전시에 섬세하고 우아한 초상화가 한 점 출품되었다. 그리고 루벤스 작품의 동물과 정물을 맡아 그리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았던 스네이더스 작품 역시 동물 정물화의 진수를 감상케한다.
17세기의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 작품들은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원래 화가에 의해 신중하게 재구성된 것으로 대부분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짧은 인생에 대한 암시라던가 검소하고 정숙한 삶에 대한 도덕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소품인 이 시기 작품에 담겨 있는 풍부한 상징성은 많은 이야기와 즐거움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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