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판화40년』전을 통하여 본 한국판화의 사적 고찰

최은주(학예연구관)

1. 한국판화의 성격
2. 한국의 고대판화
3. 고려시대의 판화		 4. 조선시대의 판화
5. 근·현대기의 한국판화
6. 한국판화의 전통성과 현대성
5. 근 · 현대기의 한국판화

가. 한국 현대판화의 형성과 전개

지금까지 살펴본 바, 우리나라의 여러가지 문화유산 중에서도 전통판화는 독창적 예술성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기술적 완성도로 그 가치를 널리 인정받아왔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매우 섬세하고 완결된 양식의 불교경전이나 유교 행실도의 판화에서 부터 투박하고 재기어린 민화, 부적, 민예품류의 판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전통판 화는 단색조의 간결, 우아함과 대범하고 자연스러운 각법, 목판이라는 재질이 주는 부드러움으로 이웃 일본이나 중국에 비견하는 독자적 예술세계를 이룩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일제 침략하의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단절되거나 상실, 왜곡된 것 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판화전통이 단절된 배경에는 판화의 정신적 맥이 수난과 격동의 근대기를 통해 변질되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판화의 기술계 승을 가능케 할 수용층이 형성되지 못하였으며, 세번째 한국판화의 가치를 발견하 고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학술적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찌기 한국판화의 우수성을 인식한 몇몇 선각자들에 의해 한국판화에 전통성과 현대성이 연결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1909년과 10년에 걸 쳐 (大韓民報)에 당시 대표적 화가였던 이도영의 원화를 이우승이 목각하여 게재하 였다는가 최초의 여류화가였던 나혜석이 월간 (개벽) 13호에 단색목판화 (개척자) 를 제작하였다는가 1932년 조선일보에 당시 사회주의소설가였던 이북명의 (질소비 료공장)이라는 연재소설의 삽화를 이상춘이 목판화로 제작하였다는 단편적인 기록 들이 발견된다.

또한 최지원, 최영림, 배운성 같은 작가들에 의해 본격적인 창작판화들이 제작되 었다는 것을알 수 있는데, 최지원은 1939년 제18회 선전에 (걸인의 꽃)이라는 작 품을 출품하여 판화로서는 최초의 선전 입선이라는 기록을 남겼으며 최영림은 일본 의 유명한 목판화가였던 무나카타(棟方志攻)에게 사사하여 일본 창작협회전과 선전 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해방후 국전을 통해 판화작품을 발표함으로써 한국현대판 화의 기틀 마련에 큰 공헌을 하였다.

배운성은 월북작가로서 해방전 그의 활동에 대 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으나 최근에 판화가로서 그의 뛰어났던 역량을 알려주는 기 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즉 1933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 목판화전에서 이등상을 수 상한 것이나 제2회 방소비만국목판화전람회에서 명예상 등을 수상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상상해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이와같은 노력을 바탁으로 한국현대판화는 그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한국판화협회(1958), 한국현대판화가협회(1968) 등 한국현대판화계를 이끈 주요 단체들이 결성되었으며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1970), 공간국제판화전(1980) 등이 조직되어 한국현대판화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또한 1980년대 이후 각대학이나 대학원에 판화과가 신설되어 판화전문인의 양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80년대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판화공방운동에 힘입어 판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 1950년대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판화가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의 일이다. 최영 림, 정규, 유강렬, 이항성 등이 판화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예술작품으 로 인식되는 판화들이 제작되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목판작업을 시도하고 있었던 최영림은 정규와 함께 1950년대 초에 잡지와 신문의 삽화를 판화로 제작하여 동료 와 대중에게 판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강렬은 염색작업과 더불어 한 국적 시정이 넘치는 목판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1951년 이항성이 최초로 다색석판 화 개인전을 개최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1949년 문교부 고시 제1호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가 창설된 이래, 1957년 동 양화, 서양화, 조각, 서예, 공예가 주축을 이루었던 국전에서 최영림이 최초로 목판 화 (나체)와 (락)으로 입선하였다.

그후 1958년 「한국판화헙회」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이항성 은 1959던 미국 신시내티 미술관 주최 국제판화비엔날레에 (다정불심)이라는 석판 화를 출품하여 우리나라 판화가중 최초로 국제전에 입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 사 건은 한국판화의 질적 가능성을 진단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1950년대 작가들에게 가장 많이 애용되었던 판화는 주로 목판이었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다른 분야에 종사하면서 판화에 손을 대었기 때문에 판화의 종 류나 기법이 다양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기법에 의존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50년대 말 주한 미국공보원이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작가들을 통해 판화의 기법이나 종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다. 1960연대

1960년대에는 앞선 작가들의 노력으로 바탕이 되고 많은 국제교류전이 유치되면 서 젊은 작가들이 판화제작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복수생산이 가능한 판화의 특성은 대중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기를 원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현대적 감각으로 다가갔으며, 표현매체의 확장과 실험이라는 측면에서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해외에서 판화수업을 받은 정규, 유강렬, 김정자, 윤명로 등이 대학에서 판화교육 을 실시하기 시작한 것도 60년대 판화발전에 큰 힘으로 작용했다.

1968년에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창립되었다. 이 협회는 이후 한국판화계의 중진을 형성한 작가들을 배출해 내었다. 창립회원은 강환섭, 김민자, 김상유, 김정 자, 김훈, 배륭, 서승원, 유강렬, 이상욱, 전성우, 윤명로였다.

또한, 이 시기에 서울대학교, 흥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판화교육이 실시되 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각급 초, 중, 고등학교에서도 판화실기수업을 단편적 으로나마 진행하였다.

1960년대 한국현대판화는 국제화의 전기를 마련한다. 예를 들면 1958년과 60년 (서독현대판화전)이 덕수궁미술관에서 개최되고, '62년에는 (현대미국판화전)이 주 한미국공보관에서 개최되었으며, '63년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 김봉태, ' 66년 (제 5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 김종학, '69년 (이태리 칼피목판화트리엔날레)에 배 륭 김형대, 서승원, 윤명로, 이상욱, 유강렬 등이 참여함으로써 한국현대판화가들 의 국제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 박수근. 나무와 여인들.
       목판화 43×33㎝. 1950년대

◀ 이향성. 영상. 석판화. 60×80㎝. 1957








▲ 유감열 풍경 동판화 30×44.5㎝. 1950년대                ▲ 최영림 불심 목판화 62×33㎝. 1950

라. 1970연대

1970년대는 풍부한 판법의 도입과 판화예술의 다양화, 고도화가 이루어진 시기이 다. 1960년대 판화가 주로 목판화, 실크스크린 등 단순한 판법으로 제작된 것에 비 해 1970년대의 판화는 목판, 실크스크린, 석판, 동판의 다양한 판법으로 제작되었 다.

판화기술의 축적과 진보로 한국화단 내에서 판화가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하기 시 작한 것도 1970년대의 일이다. 윤명로, 김구림, 박래현, 석란희, 송번수, 황규백, 한운성, 하동철 등이 서구의 발달된 판화기법을 수학하고 돌아와 작품제작에 몰두 하였고 개인전, 단체전, 국제교류전의 형식으로 판화전이 활발하게 개최되었다.

1970년대에 특기할 만한 사항중 하나는 국내 주최의 국제전이 시작되었다는 사 실이다. 1970년 동아일보사 주최로 열린 (제1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는 판화를 통한 국제교류의 가능성을 밝게 해 주었으며, 23개국에서 80명의 작가와 200여점 의 작품이 출품된 가운데 김상유가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71년에는 ( 제1회 한국현대판화 그랑프리전)이 한국판화가혐회 후원으로 명동화랑에서 개최되 었는데, 여기에서 서승원, 송번수, 김진석 등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서을국제판화비엔날레)는 1992년까지 8회째 개최되고 있다. 이 국제전을 시발점 으로 각종 공모전에 판화부문이 신설되었다. 한국일보주최 (한국미술대상전)(1970) 과, 명동화랑주최 (한국현대판화그랑프리전)(1971), 미협주최 (판화앙데팡당전 )(1973) 등에 판화부문이 신설되었고 한국현대판화가협회는 (한국현대판화공모전) 을 개최하는 등 70년대의 한국판화계는 급증하는 미술인구의 증가와 경제성장에 힘 입어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

마. 1980년대 이후

1980년 이후 현재까지 한국판화계에서 개인전, 단체전이 수없이 열리고 각종 판 화공모전, 국제교류전 등이 활발히 유치되었다. 이런 활발한 양상과 더불어 판화의 질적 가치를 재인식하고 한국적인 판화예술의 정착을 위한 노력들이 시도되었다.

공간사 주최의 (공간국제판화전)은 1980년대 제정된 것으로 소품판화(10×10cm) 를 기준으로 국제전을 유치하여 소품판화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 국제전은 작 품수송의 편리함과 외국작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7회(1992)를 개최하는 동안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판화 · 드로잉대전), 1985년 호암갤러리에 서 열린 (한국현대판화-어제와 오늘)전은 한국판화의 성격을 규명해 보려는 전시였 다.

1980년대 들어 판화계는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한국 판화협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 등의 기성단체와 「서울판화회」, 「홍익판화회」, 「성신판화회」 등 학연중심의 단체, 「대구판화가혐회」, 「부산판화회」, 「충남판화가협 회」, 「광주현대판화가협회」 등 지방 판화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와 「프린트 미 디어」, 「서을 프린트를럽」, 「목판그룹 나무」 등 신진작가들 중심의 단체들이 활발한 전시 활동을 벌였다.

한국의 전통목판화 기법을 응용한 목판화가 민중미술과 더불어 책의 삽화, 포스 터, 걸개그림 등으로 다양하게 등장한 것도 1980년대 한국판화계의 새로운 일면이 며, 컴퓨터기기들을 이용한 컴퓨터 판화가 등장하여 한국판화의 영역을 확대시키려 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사건은 판화공방의 활 성화라할 것이다. 이들 공방은 판화인구의 질적, 양적 팽창을 이루었으며 이와 때 를 맞추어 각 대학의 판화과가 신설되어 판화 전문인의 양성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 다.

1990년에 들어서면서 전후 한국판화계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진단해보려는 여러가 지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러가지 움직임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93년 5월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기획된 (한국현대판화 40년전)이다.

이 전시는 한국전통판화의 특성과 사례를 소개하고 그것들이 근, 현대판화가들에 게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이 시점에서 한국현대판화의 위상이 어떻게 정립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기위해 조직된 것이었다.

이 전시는 1950년대, 60년대, 70년대와 80년대 이후로 시기구분하여 각 시대의 대표적 작품들을 전시하고 별도의 자료관을 설치하여 전통판화 진품들을 전시함으 로써 전통의 기반하에 한국현대판화가 어떻게 시기적으로 발전되었는지를 일목요연 하게 보여 준 전시였다.


◀ 윤동천 예술과 인간 혼합기법 300×152㎝.1987


그러나 몇몇 아쉬운 점은 한국현대판화의 발전과정을 밝혀 낼 수 있는 많은 자료와 기록들이 망실되어 보다 명쾌하게 한국판화사를 밝혀내지 못하였다는 점과 제도권 밖의 판화운동-예를 들어 1980년대 민중판화운동의 큰 흐름과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의 본 래적인 취지는 어디까지나 한국판화의 전통성과 현대성의 모색 및 발전적 계숭에 있었다는 점에 미루어 나름대로의 의의를 찾을 수 있었던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