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철학적 조명

吳昞南(서울대 미학과 교수)


머리말
1. 현대미술의 배경으로서의 부조리
2. 자유의 이상과 추상적 형식주의
3. 자발성의 이상과 추상적 표현주의
4. 예술 : 자유인가 자발성인가?
맺음말 : 현대미술의 한계와 대안

맺음말 : 현대미술의 한계와 대안

현대 미술의 두 경향을 분석해 본 끝에 우리는 그것들의 최종적인 면모를 고찰한 바있다. 여기서, 이 최종적인 면모의 인식에 이르게 된 과정을 그려보도록 하자. 현대미술은 현 대인의 상황에 기초하고 있는 부조리에 그 근원이 있음을 알아 보았다.

그리고 부조리와 더불어 살 수 없는 한, 인간은 그와의 투쟁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 수 밖에 없다. 현대미술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부조리를 받아드릴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이 세계에 대해 계속 의미를 요구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조리로 부터의 탈출이라는 인간의 기획은 필연적이요 또한 긍정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현대미술은 첫째로 절대적 자유의 추구로서, 둘개는 잃어버린 직접성을 회복시켜 주려는 시도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가지 경우 모두에 있어서 인간은 의미를 대상의 세계로부터 발견하자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러므로 만약 의미가 존재한다면 그러한 의미의 기초는 대상세계를 초월한 피안의 어떤 것속에 있지 않으면안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 월자에 대해서 확실한 내용을 부여한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신을 근원적 실재로 대체한다고 할때 그것은 인간이 아무런 척도도 가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본래 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거일 뿐만이 아니라 그의 삶의 척도이기도 한 어떤 초월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세계내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게되며 또 자신에게 요 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신을 근원적 실재로 대체한 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 역시 인간의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도 제공해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본체적인 것에 대한 현대인의 감각은 구호와 권태로 변해버리지 않았 는가?

그렇다고 인간의 자유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부조리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가 앞에서 논했던 시도보다 더 성공적일 가능성도 없다. 왜냐하면 설사 그러한 시도가 기 독교적 전통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전통 역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기독교적 전통으로부터 차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 자유를 신의 위치에 두어 신이 창조하듯 자유로운 창조가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결코 신처럼 무로부터 의미를 창조할 수가 없다. 만약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것이다. 물론 자유의 숭배자는 이러한 입장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자유가 절대적인 것으로 되는 경우 자유에 대한 신앙은 미신이 됨을 면할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미술의 두가지 기획은 모두 의문과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러한 기획들은 인간이 단순한 대상의 세계에서 의미를 발견할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정당한 판단을 하고있는데 반해, 부조리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데는 실패하고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그들 기획들에 있어서의 존재에 대한 사고는 너무도 불확실한 것이어서 인간과 그리고 인간의 기획인 예술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유의미함에 대한 희미한 감각은 있지만 보다 확실한 의미에로 나아갈 길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의 신비스러운 부름은 침묵과 거의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처럼 현대미술은 그것이 기독교적인 신을 각각 절대적 자유나 혹은 직접정의 존재로 대체시킴으로써 부조리로부터 벗어나려는 기획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인 한, 그것의 기획은 부적합한 것임을 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비록 부정적인 입장에서 이기는 하지만 현대미술은 여전히 낡은 가치 체계의 전통에 기생하고 있는 문맥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미술은 이제껏 진정한 대안을 제시할 힘의 결핍을 보여준 꼴이다.

이같은 사실은 현대미술 자체가 그러한 기독교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성공적이면 그럴수록 점점 더 공허한 것이 되어 왔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증명되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그것 자체가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거나, 일체를 중단해야만 하는 단계에 접근해 오고 있는 중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한계를 드러내 보여 주는 것으로서 말레비치의 침묵의 횐 사각형이나, 뒤샹의 기성품들을예로 들수가 있겠다. 텅빈 캔버스를 예술작품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이러한 한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팅빈 캔버스는 인간에게 여전히 그의 자유를 드러내 주는 예술작품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주장하는 이에 따라서 그것은 그 이전의 어느 예술보다도 인간의 자유를 더많이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로서는 그러한 작품이 모든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기 때문에 관객으로 하여금 완전히 자유롭게 해준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캔버스에 선 하나를 긋는다거나 절 하나를 찍는 일조차도 결국은 어떤 절대적 자유의 가능성을 배제해 놓는 일이 되게 된다.

이처럼 자유를 제한해 놓을지도 모를 일체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예술가가 전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대상을 무작위적으로 뽑아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제시하는 뒤샹의 예술도 사실은 위의 말레비치의 경우나 다름없는 유사한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뒤샹이나 그 아류들은 대상을 그것의 형태나 질감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그것의 의미 내지는 의미의 결핍 때문에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전혀 아무런 이유나 의도도 없이 대상들을 단순히 "선택"함으로써 그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대상들을 단순히 그 자체로서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대상이 무엇인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대상은 그것이 바로 그것임을 드러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 술작품은 팅빈 캔버스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이상의 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성품이나 텅빈 캔버스와 같은 예술작품은 양측모두가 다 불분명한 것이며, 무의미한 것들이다.

이들 사례야말로 현대미술이 침묵하게 되는 한계점을 말해 주고 있는 증표들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현대미술이 이러한 한계에 접근해 왔고, 또 그것을 인식해온 이상 현대 미술은 그것이 단순히 권태로운 반복만도 못한 것으로 되지 않으려면 이제 종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 이러한 현대미술을 대신할 것인가?

이같은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언정 인간이 이 세계속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살아가야 한다면 대안의 제시는 예술가에게 부과된 과제요, 예술가는 그러한 과제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대미술이 안고 있는 딜레머, 막바지에 이른 그것의 한계를 인식하고, 탈출과 극복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가 이제 현금의 예술가에게 주어진 소명임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할때, 현대미술이 더 이상 변호될 수 없는 환상임을 인식한 이상, 현금의 미술가는 그러한 환상을 이상적인 것으로 가장하여, 그 속에 안주함으로써 현대인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유로부터 더이상 도피하지 말고, 그러한 자유의 정신을 가지고 그것을 환상인 것으로 솔직히 인정하는 정직함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미술가는 키취나 사이비 예술의 유혹에 기만당하지 않겠다는 정직함을 가지고 인간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말해줄 수는 없다하더라도 인간에게 어떤 소명이 있다는 점만은 드러내 줄 수가 있어야 한다. 이같은 정직한 자세로서 미술가는 세계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 법을 터득하여, 인간을 부르는소리가 무엇인지를 밝혀 주어야 한다.

그러나 미술가의 이러한 자세에 대한 요구가 전통에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술가가 그 자신을 전통적인 신에 의해 부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는 한, 그러한 전통에로의 복귀란 잘못된 신념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을 부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곧 인간이란 부름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우리는 세계내에서 우리의 위치를 알 수도 없을지 모르지만 세계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속삭여 주는 모든 언어에 주의 깊게 귀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귀기울임은 겸손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겸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간은 의미를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초월하는 어떤 것에 의존해야만 하기 때문이며, 인내가 필요한 이유인즉 우리는 의미를 단편적으로 밖에 포착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인간은 과거의 시대가 가졌던 포괄적인 비젼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여로 인해 인간은 부재하는 신의 자리에 대신 우상을 세우고자 하는 충동에 끊임없이 직면해 왔음을 알고 있다. 한 예로, 현대 미술을 통해 절대적 자유라는 신화가 얼마나 커다란 환상을 구축해 왔는가를 우리는 살펴본 바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앞서 말한대로 결코 기만당해서는 안되겠다는 의지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직함이 현대미술의 거대한 두 신화를 무너뜨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예술은 어떠한 것일수 있을까? 우리는 앞에서 예술가는 환상을 환 상으로 인정하는 정직함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직함을 가지고 세계에 다시 귀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세계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어느 대답이 곧 바로 나올 수 있으리라 기대됨직 하지만, 사실 이 물음은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철학의 근본문제에 해당되는 것이다.

본고의 논의에 적합한 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인간과 세계의 진정한 대화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대화가 늘 철학의 문제로 설정되는 것은 이 세계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정말로 세계의 참된 모습을 알고 있느냐 하는 의문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과 세계의 대화의 문제는 진정한 실재(reality) 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련되고 있다.

이러한 실재의 파악 혹은 드러냄이 과학의 능력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늘 예술과 관련되어 왔다. 그렇다고해서 정신의 자유로운 구성의 예술이나 근원의 자 발적인 표현의 예술이 그러한 실재를 드러내 주고 있지 못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 보았다. 물론 추상도 표현도 실재라는 것을 말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진정한 실재가 아닌 실재의 환상 곧 대리실재였던 것이다. 전자는 대화 이전에 세계를 부정하고 있고, 후자는 대화의 주체를 포기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미술이라는 거대한 신화를 붕괴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그 길은 진정한 실재를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예술은 어떤 새로운 형태의 리얼리즘(realism)으로 인도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할 때 현대미학은 정신만을 강조하는 주관적 관념논도, 근원으로서의 맹목적 의지와 같은 것을 상정하는 객관적 실재론도 피하는 가운데 진정한 실재파악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할 것이며, 필자는 여기서 그러한 가능성이 메를로-퐁띠(M. Merleau-Ponty) 같은 사람에게서 시사되고 있다함을 말하는 것으로 족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