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철학적 조명
吳昞南(서울대 미학과 교수)
머리말 1. 현대미술의 배경으로서의 부조리 2. 자유의 이상과 추상적 형식주의 |
3. 자발성의 이상과 추상적 표현주의 4. 예술 : 자유인가 자발성인가? 맺음말 : 현대미술의 한계와 대안 |
4. 예술 : 자유인가 자발성인가?
칸딘스키의 예술을 그의 예술관에 관련시켜 검토해 본 이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요컨대, 칸딘스키에 있어서 예술이란 형식면에 있어서는 가장 명확해야
하며, 내용면에 있어서는 가장 불명확한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칸딘스키의 요구 혹은
주장은 비록 전혀 다른 노선을 통해서 제시된 것이기는 하지만 앞에서 고찰했던 바, 주
관주의적인 미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요구와 거의 구분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서로가 대립되고 있는 양측의 접근방식이 말레비치의 슈프라마티즘과 칸딘
스키의 추상 표현주의에 있어서는 서로 합치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치가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보링거가 그의 (추상과
감정이입) 에서 하고 있는 추상에 대한 논의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같다. 보링거에
있어서도 추상이란 시간적이고 현상적인 세계에 대한 불만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었다.
이러한 불만은 현상적 세계로부터 도피하여 확고부동한 초월적 질서에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인도된다. 그런데 이같은 탈출의 기획이 형식주의 미술에서는 이상적 환경의 구
축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형식주의 미술에 있어서의 초월성은 인간 자신의 것으로
되고 있다. 즉 예술가에 의하여 창조된 인위적 질서는 자유로운 정신속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러한 정신의 드러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추상미술의 초월성에 대해 보링거는 형식주의자들 처럼 그와 같은 해석을 내리고
있지 않다. 앞서 설명했듯, 보링거는 추상미술에서 드러난 초월성을 물 자치 곧 진정한
실재와 동일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이러한 보링거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다.
즉 우리가 알아 보았듯 칸딘스키는 추상에로의 움직임을 좀더 본질적인 실재의 차원의
드러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긍정적인 의미인 한에서 두가지 종류의 추상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유미주의자들의 전통을 따르는 자유로운 정신에 의해 인위적 실재를 구성한다는
의미로서의 추상과, 다른 하나는 보링거의 견해를 따르는 칸딘스키의 추상 즉 본질적인
실재에로의 회귀라는 의미로서의 추상이다.
그러나 곰곰히 검토해 볼 때 이 두가지가
그렇게 다른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을 인식해 보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중요한
논점이다. 즉 인간의 자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추상미술의 초월성이 좀더 근본적인
실재의 드러냄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과연 가능할까? 그와 같은 해석은 정신의 자유와 자연의 자발성이
문자 그대로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위의 두
명제를 하나씩 일단 검토해 보고자 할 것이다.
우선, 인간의 자유가 근원적이요 본질적인 실재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부터 고려해 보도록 하자. 만약 우리가 쇼펜하우어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를 포함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그가 말하는 의지의 현현방식이라고 한다면 인간 자유의 자기 표현
역시 이같은 의지의 현현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 할 때 추상미술가가 누리는
자유는 그들이 생각하듯 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근원적 의지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추상 미술가는 자신의 예술속에서 나타나는 법칙들을 발
견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초월해서는 안되며, 초월할 수도 없게 된다. 사실상 이것이
보링거의 입장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법칙들이 인간 유기체속에 내재한다고 우리가
상정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현상 세계에 대한 불만을 낳고.
추상을 야기시키는 질서에 대한 이같은 요구는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자율적인 이상이 아니라 그 자신 자연에 속하는 인간의 본질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 설 때 인간의 자유는 결코 공허한 초월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에
의해, 인간에게 부과된 요구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를 오로지
자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구성물로 대체시키려는 예술적 시도는 결국에 가서 그와
정반대되는 시도, 곧 예술적 창조로 하여금 자발적 표현이게끔 하는 시도로 전환될 가
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같은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말레비치의 예술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흰 사각형이 그러한 전환점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다. 때문에 그는
"순백의 마음상태"라고 하는 차원을 개입시켜 놓고 있다. 즉 일체의 의미와 가치가 침
묵속으로 가라앉을 때 일체의 관심과 심려는 사라지게 된다는 입장에서였다. 이것은
말레비치가 자신의 예술로 하여금 모든 기획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어떠한 것도 의도하지 않으려는 채 직접성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의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예술가는 자발적인
표현의 매개자가 되고 만다. 곧 자유의 기획에 의해 요구되었던 공허한 이상성은 직접
성에로 인도되고 있다.
우리가 다음으로 검토해 보고자 하는 논점은, 그렇다고해서 자발적인 표현을 통해
직접성의 세계의 회복을 추구하려는 기획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점이다. 우리는 그러한
시도 역시 또다른 환상의 추구임을 알아 보았다.
즉 인간의 지성으로 인해 은폐되어버린
실재를 다시 드러내려는 시도는 결국 성공적인 것이 될 수 없는 것임을 알아 보았다.
왜냐하면 부조리의 근원인 인간과 세계의 양극성에 의해 분열되지 않은 존재, 즉 정신
만으로서의 존재나 자연만으로서의 존재라는 이상적 존재란 상정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해도 실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직접성의 세계, 인간의 지성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실재를 직접적으로 회복하려고 하는 시도는 포기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이 점에서 그러한 직접적인 접근을 포기하고 우회적인 접근을 시도해 보는 일이 가능할
수는 없을까? 말하자면, 유한한 베일뒤에 놓여 있는 것을 직접적으로 손에 넣으려고 하는
대신 예술가는 이러한 베일을 들어 올리거나 찢어버리려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어느 예술이 이와 같은 시도를 한다면 그것은 추상적 형식주의 미술처럼 다시 한번 부
정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유한한 정신과 그러한
정신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함으로써 베일뒤에 있는
것을 드러내어 근원에로 되돌아가기 위해 저질러지는 부정이라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예술가를 나무에 귀유하고 있는 클레에게서 이와 같은 부정적 접근의 암시를
엿볼 수 있었다. 즉 대지는 줄기를 통해 예술작품을 창조한다는 사고속에 그러한 암시가
들어 있다는 말이다. 클레는 예술가가 자연처럼 창조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 예술가가
그러한 매체가 되는가? 여기서 클레는 예술가가 이러한 자발성을 얻기 위하여 익숙한
것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즉 피상적인 표면의 근저를 꿰뚫어 보기
위해 예술가는 표면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그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할
때 예술가는 모든 자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직접성의 세계를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은 자연의 산물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초현실주의는 예술가의 창조성이라는 거대한 신화를 깨고 있다는 에른스트(M. Ernst)의
초현실주의 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요컨대 그도 클레와 다름없이 예술가의 능동적인
역할을 부정하고 수동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능동적이라고
언급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클레가 암시했듯 그가 이성이나 도덕 내지는 미학적 선입
견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놓는 경우에 한해서 일뿐이다.
이같은 우회적 접근, 이같은 부정의 방법을 통해 예술가가 요구하는 것은 예술이 그의
의도에 지배되지 않은 채 자발적으로 창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가 자발성을
이상화하는 한 그의 창조는 여전히 하나의 의도, 즉 일체의 의도들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의도에 의해 계속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러한 예술의 경우 예술가의 창조가
일체의 의도로부터 해방되고 있는 자발적인 창조인 것 같지만 실상 그러한 창조는 일체의
의도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또 다른 의도 즉, 자유의 의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는 자발적인 예술(작품)의 기초요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창조하기를 선택 흑은 의도한다는 것은 인공적이기 보다 자연적인
예술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자연적인 예술을
대하되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적 문양을 대하듯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 되기
위해 예술가가 의도한 것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자유로서 대하는 것이다.
폴록(J.Pol-
lock)의 추상은 그러한 해방의 기획에 그 기원이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관조자로 하여금
그러한 기획에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획이 바로 초현실주의의
한 경향이기도 하다.
이처럼 만약 영감이란 것이 예술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이기에 그 역할이 평가
절하되고, 해방의 기획에 좀더 커다란 중요성이 부여되게 된다면 예술이란 자발성을 방
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파괴하도록 고안된 일종의 게임이 된다.
그렇게 될
때 예술가는 보다 근본적인 실재에 직접적으로 도달하려 노력하는 대신에, 게임을 하게
되는데 이경우 정신은 인간을 그러한 실재에로 끌고 내려가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요
구받는다. 이것이 바로 초현실주의의 기본 입장이다.
물론 초현실주의 중 어떤 것은 은폐된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항을 위해
예상된 것을 단순히 부정하는 경향도 있고, 어떤 것은 끈적거림의 세계를 보여 주거나
꿈의 세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도 있다.
또 어떤 작품들은 단순히 키취일뿐인 것도
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라 불리워지는 작품의 상당 부분은 근원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피상적 이해를 깨뜨림으로써 우리를 좀더 직접적인 경험의 차원으로 내려오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에른스트는 우리가 매개적인 제3의 이미지를 제공함이
없이 전적으로 다른 두 개념을 서로 결합시킬 때 가장 강렬한 시적 효과가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또한 달리(S. Dali) 에 의하면 토마토 위를 질주하는 한 마리의 말을 상상할
수가 없다면 우리는 백치라는 것이다. 이처럼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그림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며, 마그리트(R. Magritte) 의 (피레네 성)과 같은
작품은 그 좋은 사례이다.
이러한 초현실주의를 두고 제들마이어 (H. Sedlmayr)는 혼돈의 체계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초현실주의자들이 혼돈을 체계화시키고, 따라서 그에 질서를
부여하는 정신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체계라는 관념이
의심쩍은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만 그들의 질서를 창조할뿐이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우리의 시각의 자발성을 제한한다고 여겨지는 사슬과 족쇄에 대해서는 철저히 파괴적이다.
그렇다면 초현실주의에 있어 자발적인 시각은 무엇을 드러내주는가? 사실, 이러한 물음에
자신있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왜냐하면 근원적인 세계로의 회귀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한 환상일뿐이라고 한다면 좀더 직접적인 세계에로 하강하려 한다는
초현실주의의 기획은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소망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
문이다. 그렇다면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가?
보여 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자유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드러내주지 않은 채 그냥 놀고만
있는 것인가? 결국 근원에로의 회귀를 위한 예술은 재차 자유로운 주관성의 예술과
구분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우리는 이미 말레비치의 예술과 칸딘스키의 예술에서 대비되는 두가지 접근방식이 서로
합치되고 있는 듯한 면모를 인식한 바있다. 우리는 초현실주의에 있어서도 이러한 면모가
발견될 수 있고, 발견되고 있음을 알아 보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자유의 추구는 직접성의
회복으로 인도되는데 반해, 직접성의 추구는 자유의 창의성으로 인도되고 있다는 성향을
말함이다. 그것이 말레비치에 있어서는 흰 사각형을 낳게 한 것이고, 칸딘스키에 있어서는
(즉흥)을 낳게 한 것이며, 마그리트에 있어서는 (퍼레네 성)을 낳게 한 것이 아니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같은 사실은 아이시스의 베일을 벗겨버리고자 하는 추상 표현주의
예술과 개인의 자유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 추상적 형식주의 예술은
서로가 매우 닮고 있다는 사실과, 또 두 예술은 다같이 인간이 마치도 광기의 상태에 있을
때만이 자유나 혹은 그의 존재의 근원에로 회귀할 수 있는 것인양 광기에 대단히 밀접해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두가지 사실의 함축에 대한 해석이야말로
현대미학에 던져진 커다란 문제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함축을 실현하는 예술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함축을 해석할 수 있는 미학의 출현도 사실 절박한 중이다. 이것은
곧 현대미술의 한계와 현대미학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필자는 그에
대한 대안의 예술과 대안의 미학을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한가지 가능성 속에서 양자에
대한 언급을 간단히 피력해 보고자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