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철학적 조명

吳昞南(서울대 미학과 교수)


머리말
1. 현대미술의 배경으로서의 부조리
2. 자유의 이상과 추상적 형식주의
3. 자발성의 이상과 추상적 표현주의
4. 예술 : 자유인가 자발성인가?
맺음말 : 현대미술의 한계와 대안

2. 자유의 이상과 추상적 형식주의

키에르케고르가 유미주의자라고 불렀던 낭만적 허무주의자들은 자유를 이상으로 설 정함으로써 그들을 묶고 있는 이 세계를 거부하고 있다. 즉 자연과 사회, 종교와 예술 등은 인간에게 어떤 요구를 제기함으로써 인간을 속박하고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요구들을 거부한다. 그러므로써 자유롭고자 한다.

즉, 이들에 의해 자유롭다는 것은 전통이 자신들에 대해 지정한 위치로부터 벗어남을 뜻하며, 다른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임의성을 원리로 흥미로운 것이 유미주의자들의 이상에 기여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아보았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그들의 자유의 개념이 부정적인 것이 되고 있는 데서 나온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그러나 그들 유미주의자들 보다 더욱 철저히 이 세계를 회생시켜 버린 미술가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추상미술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추상"이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와 함께 긍정적 의미도 갖고 있다. 그것은 형태파괴(deformation)와 해체(deco- mposing), 또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는 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구축(construction)이라든가 구성(composition)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추상 미술가는 파괴하기도 하지만 인간 정신의 각인이 찍힌 새로운 질서를 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단계적으로 부정적 의미의 추상으로부터 긍정적 의미의 추상에 이르는 추상미술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부정적 의미의 추상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부정의 정신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전형적인 사례를 다다(Dada)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무조건 반(anti)을 목표로 하고 있는 예술이다. 즉 반종교, 반도덕, 반자연 그리고 마지막에는 반예술까지 선언하고 있다. 다다이스트들이 세계와 그것의 모든 가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유미주의자들에 있어서처럼 그들의 자유를 위해서였다.

로 이 세계와의 투쟁에 있어서 미술은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 그들에 의하면 세계란 무가치한 것이며, 인간에게 어떤 옳바른 이상을 전혀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괴팍하고 비정상적이며, 전혀 받 아드릴 수없는 것들을 추구한다.

한 예로, 예술가가 악의 편을 택하는 이유는 그가 악마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이제 그가 더 이상 신봉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게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 가치체계들과의 불행한 관계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적인 배경 없이는 전혀 생각해볼 수 없는 예술이 나타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적 배경과 맺고 있는 관계는 부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는 기독 교로부터 출발해서 이제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악마적인 것의 옹호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극단적인 예가 롶스(R. Rops) 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이다. 이 작 품에서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관능적인 나체로 대체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비어즐리(A. Beardsley)는 성적인 행위를 지배하고 있는 전통적인 규범에 도전하기 위하여 음란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가치체계만이 자유에의 길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애초 지녔던 힘을 잃게 되면 그에 대한 공격은 무의미해지고 말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표적을 바꾸어 세계 자체를 공격하게 되었다. 세계를 파괴하는데 있어 그 첫 단계가 바로 형태파괴이다. 물론 예술에는 긍정적인 표현을 위해 항상 형태파괴가 있어 왔다.

중세 초기의 미술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형태파괴는 본질적으로 부정적 경향을 띠는 특징이 있다. 즉 어떤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상적인 것을 부정하고, 예상을 뒤엎기 위해 형태파괴가 수행되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술을 예견했던 보드레르(C. Baude- laire)는 예술가란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해체시키는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이같은 보 드레르를 포함하여 많은 현대미술가들에 있어서 이상화란 비현실화(derealization)가 되고 있다.

이같은 세계해체를 인간에 적용시켜 본다면 형태파괴는 이른바 비인간화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사례로서 초상화가 그 중요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상화란 인간에 대한 존경에서 잉태될 수 있는 것임에, 자신의 얼굴이 지겨워지고 또 인간에 대해 권태를 느낀 현대미술가들은 초상화를 그리되, 그 주인공을 자기의 창조를 위한 한 소재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는 비인간적인 놀이를 고안해 내고 있는 것 일뿐이다.

즉, 자유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쥬네(J. Genet)와 같은 사람은 그러한 놀이를 예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연출했던 사람이다.

자신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우리까지도 해방시키고자 하는 투쟁속에서 화가들이 사용한 또 다른 무기는 탈방위(disorientation) 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점의 고정을 기초로 하고 있는 원근법이 거부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마리땡(J. Maritain)과 같은 사람은 이같은 현상을 두고 그것을 원근법이 출현하기 이전의 중세미술과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세미술이 원근법을 거부했던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시선을 현상에 결부시킴으로써 보다 고차적인 실제를 드러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달리 현대미술에 나타난 원근법의 파기는 중세의 경우와 동일한 기획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현대에 있어서는 중세에 있어서처럼 고차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원근법이 파기되었다는 측면에서는 세잔느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그의 경우는 세계에 보다 충실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미술가들은 이러한 태도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지점으로까지 원근법의 파기를 몰고 갔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입체주의자들의 그림에 있어서 전통적인 원근법의 거부는 보다 커다란 자유를 위해 방위라는 수단을 거부하는 해방기획의 일환으로서 발전되기에 이 르렀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상과 하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인 것이다.

이제 추상화에 있어서는 어디가 위인지가 분명치 않다. 이러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우리는 그림을 거꾸로 걸어 놓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형태의 부정이 수행되어 온 결과 최종적으로는 미술가가 자기의 예술 자체를 거역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짜라(T. Tzara)는 자유를 위해 예술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는 "예술은 잠들어 버렸다‥그래서 뜻도 모른 채 지껄이고 있는 `예술' 이라는 말은 다다로 대체되었다.‥‥예술은 수술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파괴적 의도는 뒤샹이 콧수염을 붙인 모나리자를 그리거나 변기나 병건조기, 눈치는 삽등과 같이 대량생산된 대상들을 작품으로 제시하는 경우 더욱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비예술(non-art)이 얼마되지 않아 표준화 되고 수집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는 점인다. 뒤샹이 아이로니로써 해체시키고자 했던 전통이 부활되고 있을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도로부터 그는 오히려 이득을 보고 있다. 즉 그의 작품은 팔려 나갔으며, 미술관에 소장되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러한 작품들이 예술인 것으로 모방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비예술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예술의 전달성에 대한 거부가 또한 시도되었다. 현대미술은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난에 직면해 온지는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을 해왔던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이 현대미술에 대해 공감적이지 못하며, 무감각하다는 역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현대미술에 대한 옹호를 위해 이같은 식의 역습은 유감스럽게도 오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미술가들은 자 신들의 작품이 잘못 이해되거나 이해되기 힘든 경우가 자주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전달가능성이라는 기준은 전퉁적인 사고로서, 이러한 사고에 의해 현대미술을 평가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 된다. 현대미술의 은둔주의(hermetism)는 그래서 나타나게 된 것이며, 자유의 이상화를 강조하는 한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로서 전달가능한 예술, 그러한 의미에서 공적인 예술은 원칙적으로 불가능 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될 때, 예술은 가능한 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쉽게 이해된다면 그의 예술은 그만큼 자유로운 정신이 덜 발휘된, 덜 창조적인 것이 되게 된다. 여기서 바로 은둔주의는 무의미(non-sense)와 예술을 구별하기 어렵게 만들며, 심지어는 구분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기조차 한다. 그래서 침판지가 미술상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게까지 된다.

우리는 이같은 사례를 말해주는 많은 에피소드를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 자유의 이상화가 유지되고 있는 한 이러한 혼돈을 언제고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같은 은둔적인 예술작품은 어떤 것도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침묵(sile- nce)을 지향하고 있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말라르메(S. Mallarme)는 시란 말없는 백지여야 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현대미술가들 중에서 이러한 강령을 가장 엄격하게 그리고 가장 의식적으로 따른 화가가 바로 말레비치(K. S. Malevich)이다.

말레비치는 그의 저술속에서 자신의 슈프라마티즘(suprematism)은 인간상황의 부조리 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카뮈와 마찬가지로 그도 부조리의 근원은 고차적인 의미 혹은 목표에 있다 라는 허황된 요구에 있는 것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종교나 과학 혹은 예술 등은 이러한 요구를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표현해 놓고 있는 것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들로부터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정된 것이 그의 슈프라마티즘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러한 인간 활동들이 기획된다 한들 중세의 종교나, 근대의 과학 및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을 돌아 볼 때 세계는 여전히 인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무심한채로 있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인간은 이같은 부조리를 극복해야 되는데, 그 러나 이 세계속에서 인간이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를 묻는 한, 부조리는 계속 하나의 위협으로서 남아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세계로부터 의미가 획득될 수없는 것임이 밝혀진 이상 의미를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음 자체가 더 이상 제기되지 말아야 한다. 이같은 생각에서 말레비치는 "나는 창조적 활동을 자유로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표현이란 어떠한 물음도 제기되지 않는 활동을 말한다. "라고 쓰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예술가란 그 자신이 의도하고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사고와 구별되는 창조적 자유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곧 말레비치의 자유는 어떤 의미를 묻고, 요구하는 일로부터 해방된 자유요, 따라서 부조리를 초월하고 있는 자유다.

이같은 사고는 만약 인간이 세계에 대해아무 것도 묻고 요구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인간을 실망시킬 수도 없을 것임을 뜻한다. 말레되치가 강조하고 있듯, 그러한 자유는 어떤 의미추구를 초월하고 있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를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라 자발성(spontaneity)으로 되어 버린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문자 그대로 자발성으로 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자유로 하여금 자발성이 되게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유가 자발성이라는 하나의 목적 혹은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레비치가 이해하고 있는 자유의 의미에서 보면 그 자신은 결코 자유로을 수가 없게 된다.

말레비치는 이처럼 자발적이 되고자 하는 자유의 개념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상적인 존재양식을 초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러한 자유이기에 자유는 평정을 요구하는데, 인간은 세계에 연루되어 있는 까닭에 그러한 평정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유를 위해서는 좀더 적합한 환경으로 이 세계를 대체시킬 필요가 있다. 비재현적인 미술(non- representational art)은 바로 이러한 환경을 제공해 주는 예술이며, 그것만이 "순백의 마음상태(white state of mind)"를 야기시킬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순백의 마음상태란 세계에 대한 인간의 모든 관심과 심려가 침묵하게 되고,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원하지 않게 될 때 야기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이와같은 말레비치의 미술론이 얼핏 쇼 펜하우어(A. Schopenhauer)를 연상시키고 있음은 웬일일까? 실제로 그들 간에 어떤 관계가 설정될 수 있을까? 추후 우리는 그 점 역시 음미해 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비재현적인 미술이 다 그러한 평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 형태와 색들도 우리를 감동시키고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암시하고 기억나게 하는 모든 재현적인 요소를 내팽개쳐버렸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말레비치의 그림은 가장 추상적인 형태로서의 사각형과 가장 추상적인 색으로서의 흰색에 의존하고 있다.

곧 그의 슈프라마티즘 양식의 기조는 횐 사각형이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기한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칸딘스키가 청기사파의 역동적 표현주의 (dynamic expres- sionism)에 서정적인 요소가 있다하여 기하학이라는 언어를 이용한 추상표현주의에로 나아간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칸딘스키의 추상에 대한 사고는 말레비치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 때, 말레비치의 횐 슈프라마티즘은 추상에 대한사고를 한껏 더 밀고 나가 칸딘스키의 (즉흥)과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형이나 색마저 없애버리자는 기획에서 나온 것일까 ? 그렇다면, 말레비치의 슈프라마티즘은 칸딘스키의 추상표현주 의와 같은 맥락의 예술이라고 하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 아니면, 양자는 서로 다른 원리에 입각하고 있는 다른 양식의 것일까? 우리는 앞으로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어떻든 현대미술에 있어 말레비치의 횐 사각형의 기본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다다 이후 온갖 부정과 파괴가 자행된 귀결로서의 횐 사각형속에서 기하학적 형태의 새로운 세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서 추상이라는 말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고 했으며, 그 중 부정적 의미의 추상에 관련되어 전개된 현대미술의 한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추상이라는 말에는 구성이라는 긍정적 의미도 있다.

이 긍정적 의미로서의 추상미술이 바로 다음 항목에서 고찰하게 될 추상적 표현주의와 함께 현대미술의 커다란 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추상적 형식주의(abst- rack formalism) 혹은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것이요, 부정이 수행되고 난 후의 말레비치의 횐 사각형위에 세워진 새로운 세계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미술의 철학적 전제와 그 기초를 검토해 봄으로써 그것이 추구하고 있는 이상이 무엇인가를 고찰해 보고자 하겠다.

말레비치가 슈프리마티즘을 발견하기 4년전, 그리고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작품을 발표하기 2년전 보링거(W. Worringer)는 (추상과 감정이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인의 상황은 추상적이며, 기하학적인 예술을 요구하고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당대의 미술현상에 별반 익숙치 않았던 단순한 없다는 입장에서 추상양식의 개념을 도입해 놓고 있다. 즉 미술사의 전개는 이제까지의 인류가 맞이해 왔던 시대상황의 특성에 따라 양식상 추상과 자연주의가 번갈아 가며 발전해 온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현대인의 상황을 검토해 볼때 르네상스 이래 근대 구라파를 4세기여나 지배해 온 자연주의 예술이 새로운 추상으로 대체되게 될 것임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예고했던 것이다.

보링거에 의하면 이 같은 두 양식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세계에 대하는 두가지 방식에 따라 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세계속에서 고향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거나, 아니면 어떤 불길한 타인과 마주치게 된 것 같은 이방인으로서 그 속에서 활동하거나 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정신적 전제는 범신론적인 데 비해, 후자의 그것은 허무주의적이다. 보 링거는 이 두전제를 각각 감정이입 충동과 추상충동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충 동 때문에 예술에 있어 두가지 상이한 접근이 있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미술사 기술에 적용되기 전의 이와 같은 이론적 도식은 맆스(Th. Lipps)의 감정이입설의 미학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비판하는 데서 구해지고 있다. 맆스에 의하면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이 성공될 때 인간은 대상과 일치됨을 느낀다. 즉 인간은 대상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화가 발견되는 경우에 있어서만이 우리는 대상을 아름답다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입이 실패하게 될 때, 즉 감정이입의 시도에 대해 대상이 저항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추하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맆스는 전자를 적극적 감정이입, 후자를 부정적 감정이입이라 하고 있다.

보링거의 비판은 여기서부터 출발되고 있다. 만약 맆스의 이론이 옳다고 한다면 미술 사에는 추하다고 판단되는 미술작품이 수없이 많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작품들이라고 해서 추하다고 될 수없는 한, 맆스의 감정이입설은 한 쪽의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의 원리가 되고 있는 것일뿐이고, 따라서 또 다른 원리가 요구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곧 추상충동에 입각한 추상이라는 양식인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과 세 계와의 친화관계에서 성립하는 자연주의적 미술이 있고, 불화관계에서 성립하는 추상미 술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속에서 고향을 상실했다는 감정에서부터 탄생되는 예술 또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8세기를 통해 숭고에 대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보링거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무상함과 우연성때문에 시간을 극복하고 그 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그 어떤 것을 구축해 보고자 하는 욕망을 느낀다. 그리하여 자신의 운명인 불확실성과 혼돈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끔 해 주는 그 어떤 것을 추구한다. 이에 대해 종교가 하나의 탈출경로를 제공해 주며, 예술이 또 다른 경로를 제공해 준다.

여기서, 예술에 있어서의 탈출의 시도는 견고하고 질서가 있는 형태를 추상양식에로 인도될 것 이라고 보링거는 주장했다. 그렇다 할때, 감정이입이 유한한 시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행복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추상은 시간을 공간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켜 놓으려는 욕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있다.

그런만큼 추상은 생성계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노력속에서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예술이라 할 수있다. 그렇다면 이 초월적 실재는 플라톤(Platon)이 말했듯 참으로 실재적인 것이거나 단순한 환상이거나 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여기서 보링거는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 으로서의 초월적 실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추상미술가들이 말하는 실재는 정신이 만들어 낸 단순한 구성물로서 일종의 환상(fantasy)이 되고 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슈나이더 (D.Schneider)는 미술에 있어서의 추상적 형식주의란 예술가의 무능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하고 있다. 즉 자신이 대하고 있는 적대적인 세계와 투쟁할 수 없는 예술가가 대신 자신의 자아에로 몰입해 버린 결과가 바로 그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렇다고 할 때 예술가의 추상적 환상은 진정한 실재의 대리자 곧 대리실재(substitute reality)가 되는 샘이다.

즉 추상적 형식주의란 주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대리실재에 의지함으로써 적대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추상적 형식주의 미술은 기본적으로 나르시스적이다. 그러나 나르시시 즘으로 전락한 형식주의 미술의 무능은 단순히 세계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없는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관으로 하여금 이 세계와의 의미있는 관계를 갖지 못하게끔 만든 보다 근본적인 현대인의 위기의 증후로서 이해되야한다.

곧 현대인이 경험하고 있는 부 조리로 부터 벗어나고자하는 한 방식으로서 주관에로 탈출하고자 한 기회의 일환인 샘이다. 이러한 점에서 추상적 형식주의는 자유를 이상으로 하고 있는 낭만적 허무주의 곧 유미주의 문맥의 예술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발레리(p.Valery)가 시를 두고 지서의 향연이라고 했듯, 보들레르가 계산이라고 믿었듯, 이 미술에서도 정서와 무의식적 영감에 대한 불신이 강조되고 있다. 대신 엄격한 지적 뮤즈의 도움을 받고있다.

그리하여 미술가는 공학자의 모습을하고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피카소(p.Picasso)와 브락크 (G.Brague)혹은 그리(J.Gris)등과 같은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쉽게 인식되고 있다. 예컨대, 브락크는 예술가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주고 있다. 예술가는 견고한 것으로 생각되는 어떤 사물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이 진실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물들도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은 오로지 우리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명 석함과 견고함에 대한 정신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이 세계에 직면하여 미술가는 훨씬 지속적인 새로운 세계를 정신의 이미지로써 창조하는 존재이다. 이제 자연과 세계는 정신의 이미지로써 재창조되고 있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에 의해 명령된 질서에 굴복하게 되었다.

요컨대,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정신이 진공속에서 만들어 낸 구성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만이 예술가는 자신의 정신의 자유속에서 진정으로 신과 같은 창조자가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신의 창조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경우에만 예술가는 비로소 완전한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며, 지금까지 자신이 놓여 있었던 불투명한 세계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부조리를 피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낭만주의의 한 경향인 유미주의로부터 현대에로 이어지는 예술의 한 흐름을 읽을 수가 있게 되었다. 추상적 형식주의 또는 기하학적 추상은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 상에서 나온 현대미술의 한 경향이다.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신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요, 따라서 비록 부정적 의미로서 이기는 하나 중세의 기독교적 전통에 기 생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 보았다. 즉 몰락한 신의 자리에 인간의 자유가 대신 들어앉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신처럼 인간이 이 세계의 초월적 기초가 될 수가 있을까? 세계는 인간에 대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또 인정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이 세계에 관련된 부조리한 존재임을 인식하여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경우에 있어서 조차도 인간은 세계에 관련되어 있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가 전적으로 자율적이고 독립 적이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세계와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이 대립해 있는 부조리한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인간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음을 뜻한다.

이 같은 사실은 또한 인간의 삶 자체를 예술적 구성으로 변형시켜 놓는 일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그래서 자유의 이 상화라는 유미적 삶의 이상을 삶에서가 아니라 예술에서 실현시켜 보고자 했던 것이 이른바 유미주의적 맥락의 추상적 형식주의 미술의 기획이 아니었던가 ?

사실상 이같은 기획은 잃어버린 실재를 되찾기 위해 잃어버린 것에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리실재를 설정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꾸며낸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 함으로써 그것을 되찾으려는 태도이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를 즐기며, 자신의 환상과 환상으로 고안된 고뇌까지도 즐긴다. 그리하여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세계에 던져짐으로 해서 생겨나는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현대미술은 자기 향수를 목적으로 환상을 창조하고 있는 키취(kit- sch) 와 깊은 관계가 있다. 대상에 대한 거리를 좀더 자유스러운 유회로 발전된 키취가 다름 아닌 추상적 형식주의 미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술의 제일 과제가 있다면 이와 같은 키취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 이 예술은 신의 연기를 연출하며 환상을 즐길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반성하는 가운데 재차 아이로니칼한 예술을 수행하지 않으면 않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