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철학적 조명

吳昞南(서울대 미학과 교수)


머리말
1. 현대미술의 배경으로서의 부조리
2. 자유의 이상과 추상적 형식주의
3. 자발성의 이상과 추상적 표현주의
4. 예술 : 자유인가 자발성인가?
맺음말 : 현대미술의 한계와 대안

3. 자발성의 이상과 추상적 표현주의

앞 장에서 논한 추상미술의 근본원리는 요컨데 이 세계내에서의 인간의 삶이 맹목적 이라는 입장에서 정신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그러한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가공의 환 상을 창조함으로써 맹목적 삶을 보상받으려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속에서의 삶이 허물어지는 것도 아님을 간단히 시사하고자 했다. 여기서, 삶이 허물어지기는 커녕 삶이 맹목적이라는 정신측의 주장에 대해 오히려 자기 권리를 옹호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할 때, 추상미술이 기초하고 있는 자유로운 정신이라는 이상적 인간상은 인간의 본질을 정당하게 다룰 수 없는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즉 그러한 이상때문에 억압된 것이 다시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나설 수 있다. 그리하여 이상에 대한 반이상이 설정될 수 있다. 이같은 반이상의 요구가 강력해 질수륵 그것은 오히려 이상을 대체시킬 수도 있는 일이다.

현대를 통해서 우리는 이같은 대체의 흔적들을 찾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는 태도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엔 또 다른 인간상이 출현하여 기존의 입장과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다윈(C. Darwin)이나 프로이트(S. Freud)를 생각하면 이러한 사실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종종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있지만 다윈은 인간이 신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원숭이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프로이드는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정신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동요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해 왔다.

그것이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이미 말한대로 이성 혹은 지성과 같은 개념들을 가지고서는 인간존재에 대해 완전한 설명을 할 수 없는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같은 개념들은 인간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을 밝혀줄 수 없으리라는 의혹마저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러한 의혹은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이제껏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부분을 밝혀내어, 그것을 강조하려는 새로운 인간관의 발전에로 인도되기 마련이다. 현대를 통해 이러한 시도를 위한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이다. 우리는 그의 철학의 기본을 간단히 고찰해 본 후, 그것이 어떻게 마크(F. Marc)와 칸딘스키(W. Kandinsky)와 같은 현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하겠다.

우선, 쇼펜하우어는 인간존재의 본질이 정신 또는 사유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부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육체 가운데 우연히 존재하게 된,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 흔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이 육체라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잔신이 욕망(desire) 덩어리 임을 알고 있다.

따라서 육체를 외투에 비유하는 플라톤의 은유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 인간은 외투를 내어 버리듯 자신의 육체를 벗어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쇼펜하우어는 플라톤-기독교적 인간관을 부정하고 있다. 비슷한 입장에서 그는 지성을 가지고 세계를 초연하게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전통적 경향을 또한 거부하고 있다.

인간은 객관적 관조를 추구하기 이전에 생명을 영위하고 번식하기를 원하고 있다. 요컨대, 사유란 개인이 처해있는 상황을 지배하기 위하여 그가 택한 방식들 중의 하나이지 인간존재의 전부가 아니다. 그런만큼 우리는 인간을 하나의 빙산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인간 본성의 가장 큰 부분은 의식 이전의 반의식 혹은 잠재의식에 감춰져 있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의 인간관은 전통적인 그것과 일치하는 데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단 한가지 점에 있어서만은 그것과 닮은 데가 있다. 그 역시 인간이란 만족을 모르는 존재로 보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플라톤은 (심포지움)에서 미에 대한 사랑을 역설했던 것이며, 중세의 기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케 했던 것이며, 낭 만주의자들에 있어서는 무한자가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며, 그에 이를 수 없음을 안 유미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환상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고들은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결핍된 존재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어떤 초월적 이상을 설정하고 있는 태도들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이러한 결핍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데 그의 특징이 있다. 우선, 그는 예컨대 플라톤이 말하는 이념의 세계와 같은 이상을 믿지 않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 초월적 본질이란 없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 그러한 초월적 이상을 위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이 그에 있어서는 불가능하계 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삶은이성이 결핍된 단순한 연속이게 된다. 그러므로 궁극적 만족에 대한 인간의 요구는 결코 충족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만족이라는 이상은 인간의 본질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늘 고통의 연속이요, 그래서 삶은 고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 바있다.

이처럼 그는 인간 고통의 원천을 정신이 아니라 욕망에서 찾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같은 욕망을 "살려는 맹목적 의지"라고 하면서, 구름이나 시냇물이나 성애같은 결정 체들에 있어서는 가장 약하게 현상하지만, "이러한 의지가 식물에서는 좀더 강하게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는 가장 완전하게 나타난다"고 쓰고 있다.

이처럼 그는 정신을 의지가 현 상하는 가장 고차적인 형태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고통을 드러내고, 그것을 설정하는 것을 바로 이 정신이라 하고 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인간관을 받아드리고, 동시에 고통의 원천이 욕망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일단은 정신에서 찾아진다면 전혀 다른 프 로그램이 제시되게 될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게 될 때 인간존재의 보다 근본적인 차원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간은 정신을 부정하게 될것이며, 그 정신이 세계에 부여했던 허식을 세계로부터 벗겨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신이 결폅된 무한한 자발성(spon- taneity) 의 삶은 인간을 개체화시켜 놓는 정신(individualizing spirit) 과 대립되게 될것이다. 이제 정신의 자만심이 세웠던 기획은 그 정신때문에 인간이 버려왔던 낙원, 곧 근원에로 회귀하려는 기획에 굴복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예술에서 이처럼 근원에로회귀하려는 욕망은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거 부로서 나타난다. 우리가 알고있는 일상적 모습의 세계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이 예술은 우리가 앞서 논했던 주관적인 예술 곧 인간 자유의 기초위에서 수행된 예술과 비슷한 데가 있다. 위의 두가지 예술은 모두가 일상적 관심과 심려로 인해 우리가 얽매이게 되는 세계에 대한 불만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주관주의자가 자유로운 정신의 구성물속에서 대리실재를 찾고 있는 중에 일상의 세계가 충분히 정신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 일상의 세계를 거부하고 있는 반면, 이제 우리가 다루어 보려는 예술이 일상적인 세계를 거부하는 이유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 그것은 정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기도로서, 일상적인 세계가 지성에 의해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은 현상적 세계로부터 물러서는 대신 그러한 존재의 비밀을 꿰뚫어 보기를 원한다.

즉 그것은 개별적 현상 배후에 있는 본질적 실재, 쇼펜하우어가 이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통찰하고 드러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글을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구름이 움직일 때 만들어 내는 형태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본질적인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즉 구름은 신축성 있는 수증기로서 바람의 힘에 압축되고 부유하기도 하고 확산되기도 하며, 또는 흩어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구름의 본질이며, 구름속에서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놓고 있는 〔구름의〕이념인 것이다.

구름이 만들어 내는 실제적 형태들은 다만 개체적 관찰자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돌위로 흐르는 시냇물에 있어 시냇물이 돌위에 부딪쳐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나 물결 혹은 물방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비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력을 따른다는 점과 비탄력적이고, 가변적인 무형의 투명한 유동체로서 작용한다는 사실은 물의 본질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본성이 지각을 통해 인식된다면 이것이 물의 이념인 것이다‥‥구름이나 시냇물이나 성애의 결정들속에 현상하는 것은 의지가 가장 약하게 반영된 것들인데, 이러한 의지는 식물에 있어서는 보다 완전하게, 동물에 있어서는 더욱더 완전하게,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는 가장 완전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같은 인용절은 그의 철학의 반개체주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휴머니즘의 흔적을 여전히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수가 있다. 왜 의지는 인간에게서 가장 완전하게 드러나야만 하는가?

오히려 인간은 자아 의식적 개체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체가 됨으로써 의지의 직접성(immediacy)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닌가? 만약 우리가 이같은 이기주의로부터 탈피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인간으로부터 동물로, 동물로부터 식물로, 식물로부터 광물로, 나아가 아직 일정한 형태를 취하지 않은 어떤 힘들로 거꾸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는 안되는가?

왜 우리는 의지가 인간에 있어 가장 완전하게 현상한다고 말해야 하며, 왜 개체적인 인간 존재를 그린 그림을 최고의 것이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점에서 보다 반휴머니 즘적인 마크의 예술이 잉태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 볼수가 있다.

나는 대단히 일찍부터 인간이 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게는 동물이 인간보다 아 름다우며, 더 순수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동물에게서도 너무나 역겹고 추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표현들은 내적인 힘에 의해 본능적으로 좀더 도식적이며 추상적인 것이 되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나무들과 꽃들과 대지가 내게는 좀더 추하고 역겨운 국면들을 보여주었으며, 결국 나는 갑작스레 자연도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본능은 나로 하여금 동물에서 벗어나 추상에로 향하게끔 인도했다. 그것은 추상이 나에게 더 많은 자극을 주었고 그 속에서 생명감이 순수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추상미술은 세계에 대한 이미지들을 통해 자극을 받은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세계에 대하여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계 자신으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려는 시도이다"

마크의 이 말은 앞서 인용한 쇼펜하우어의 생각과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말한대로 근원에 대한 추구에 맞춰 자기의 예술을 단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추상의 단계에서 근원에 대한 추구에 맞춰 마크는 역동적인 추상 표현주의(dynamic abstract expressionism) 에로 나아감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작품으로서 (싸우는 형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힘을 보면 그것은 아직 대상을 형성하기에 충분하리만큼 분화되어 있지 않은 힘들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생명감이 순수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마크는 자연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연으로 하여금 인간의 지성에 의한 왜곡된 해석으로부터 벗어나 자연 스스로 말하게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술작품 속에서 세계 스스로 말하게끔 하려면 화가는 그 자신이 자연의 한 부분의 자 격으로서 창조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즉 예술가는 인간과 인간을, 피조물과 피조물을 갈라놓고 있는 심연에 교량역활을 할 수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 점에서 마크는 쇼펜하 우어가 윤리적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공감(sympathy) 이란 개념을 이어 받아, 그것을 모든 존재에 확대시킨 "범신론적 감정이입(pantheistic empathy)" 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에게 있어서 공감은 예술가로 하여금 다른 피조물들의 영혼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마법의 열쇠가 되고 있다.

이같은 마크의 예술이 그 목적에 있어서 앞장에서 고찰한 주관에 입각한 추상적 형 식주의의 예술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파악하려 한다면 우리는 단지 다음과 같은 브라크의 말을 상기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브라크에 의하면, 물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상적인 세계와 그속에 존재하는 인간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예술-그것이 아카데미즘이던, 19세기의 사실주의이던, 인상주의이던-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브라크와 마크는 물론 공통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상적 세계를 벗어나는데 있어서는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다. 즉 구조주의자인 브라크는 정신의 공학자인 반면, 마크는 마술사이다. 전자는 정신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후자는 은폐된 근원적 실 재에로 회귀하기 위해 정신을 거부해 버리고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크는 일상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브라크에서와 같이 공허한 이상에로의 도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지(earth) 에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율성을 추구하는 구조주의자들은 자신이 뿌리를 잘라내고 있는 반면에, 청기사파 (Der B-laue Reciter)회원들은 예술가란 뿌리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클레(p.Klee)는 예술가를 나무의 줄기에 비유하고 있다.

즉 줄기를 통해서 대지의 힘은 가치와 잎에, 즉 예술작품에 전달될 수 있다고 하면서, "뿌리로 부터 수액이 올라와 예 술에까지 이르며, 그와 그의 눈을 거쳐가게 된다. 따라서 예술가는 줄기의 위치를 차지 한다.‥‥‥예술은 복종하지도 지배하지도 않으며, 다만 매개할 따름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참으로 겸손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가지 끝의 아름다움은 예술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를 거쳐 지나간 것일뿐이다"고 쓰고 있다.

이처럼 클레는 예술작품의 힘이란 대지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예술가가 자 연처럼 창조해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오히려 자연이 예술가를 그 매개로 이용하여 창 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때 이제 예술가는 자신이 직접 쓰지 않은 희곡의 상연을 지켜보는 관객의 꼴이 된다. 따라서 예술가는 그의 앞에 놓여 있으며, 그가 보고 있는 이미지를 반드시 따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클레가 꿈꾸었던 훨씬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자연적인 예술에 대해 마크는 그것을 우리가 익숙해 있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의 재출현"이라 하고있다. 즉 예술가는 직접성의 대해에 뛰어들어 자연의 힘과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세계는 우리에게 낯설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게 되며, 그리하여 세계와의 익숙함이 은폐되어 왔던 자연의 본질에로 회귀해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크가 이룬 발전은 지나치게 교묘하다 할만큼 예술의 유형을 근원에 대한 추구에 맞추고 있다. 그러나 마크의 신념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기는 했지만 칸딘스키의 작품들은 이러한 단순한 도식에 맞추기에는 복잡한 일면이 있다. 왜냐하면 칸딘스키는 마크의 예술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예술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말레비치의 예술과 공통된 점이 많아 보이는 예술을 택하고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청기사파의 역동적 표현주의 요소와 모스크바 학파의 추상적 구조주의(abstract constructivism) 요소 모두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같은 칸딘스키의 예술이 (즉흥)이라는 작품에서 잘 예시되고 있는 추상적인 역동적 표현주의(abstract dynamic expressionism)에로 귀결되고 있음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칸딘스키 역시 자연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그것의 껍질을 벗겨 놓고자 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예술관을 뒷받침하기 위해 칸딘스키가 발전시킨 이론은 마크의 관점과 맡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추상화는 자연의 껍질을 폐기하는 것이지 자연의 법칙을-즐겨 쓰는 말이 허용된다면 자연의 우주적인 법칙을-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추상 화가는 자연의 어느 일정한 대 상에서가 아니라 무한한 자연, 그가 그의 작품속에 요약·표현해 놓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이러한 종합적 기초는 그에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의 형태를 찾게 마련이며, 이것이 바로 추상이다. 그러므로 추상화는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자유로우며, 재현적인 미술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나는 우리가 육안으로 혹은 현미경 내지는 망원경을 가지고 보는 모든 사물들의 `내밀한 영혼'(secret soul) 과의 만남을 내적인 `시선'(vision) 이라고 부르겠다. 이러한 시선은 단단한 껍질, 즉 외적인 `형태'를 뚫고 들어가 사물의 내적인 존재(inner being) 에 도달한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 마크나 클레와 마찬가지로 칸딘스키도 예술을 교묘한 발명(invention)이라고 생각하는 예술가들을 비난한다. 그에 의하면 그러한 식의 예술은 공허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한다. 의미있는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는 어떤 것을 표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표현되어야 할 것은 사물들의 "내밀한 영혼"이거나 혹은 정서(emotion) 라고 할 수가 있다.

사물들의 내밀한 영혼과 정서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내밀한 비밀은 인식되는(understood) 것이 아니라 느 껴지는(felt)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밖으로부터는 그러한 비밀에 접근할 수가 없다. 다시말해, 그것은 인간 자신속에서 살아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의 한부분이기 때문에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을 정서의 언어, 내밀한 영혼의 언어라고 간주함으로써 칸딘스키는 쇼펜 하우어의 음악미학을 회화에 적용시켜 놓고 있다. 이같은 그의 시도는 마크가 추상에로의 움직임을 현상으로부터 의지에로라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입각, 발전시켜 놓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마크는 "현대 미술가는 더 이상 자연의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미미한 현상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위대한 법칙을 제시하기 위해서 자연의 이미지를 파 괴한다. 쇼펜하우어를 빌어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해 승리를 획득했다"고 쓰면서 실제로 쇼펜하우어를 거론하고 있다.

이러한 마크의 진술은 현대미술이 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의 음악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쇼펜하 우에 따르면, 음악만이 "내적인 자연, 즉 모든 현상의 즉자태인 의지자체"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크나 칸딘스키가 얼마나 많이 쇼펜하우어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적 예술을 창조하는데 성공한 칸딘스키는 그 후 양식상 이러한 예술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즉 칸딘스키의 서정적 추상은 1920년 이후 기하학적 구성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언급하는 가운데, 칸딘스키는 자신의 역동적 표현주의에 대한 불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역동적 표현주의가 개체성의 입장에서 인간의 특징이 되고 있는 개별적 정서를 표현은 해주지만 개체화의 원리에로 침투하지는 못한다는 점때문 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예술 자체와 그러한 예술에 대한 반응이 너무나 개인적인 것 이라는 생각이 그를 엄습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칸딘스키는 좀더 보편적인 예술을 원하게 되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진정한 예술가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좀더 본질적인 실재의 차원을 꿰뚫어 보고 싶다는 칸딘스키의 바램은 그로 하여금 결국은 덜 자발적이고 좀더 냉철한, 그래서 좀더 지적인 예술을 발전시키게끔 했던 것이다.

칸딘스키의 후기 그림들은 이러한 그의 예술관을 잘 예시해 주고 있는 것들이다. 하버트 리드에 의하면 이 최종적인 단계에 이르러 그의 상징적 언어는 전적으로 구체적이거나 객관적이 되어갔으며 동시에 초월적이 되어갔다고 쓰고있다.

말하자면 더 이상 감정과 그것을 지시하는 상징간의 유기적 연속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즉 표현되어야 할 예술가 마음속의 정서와 비개인적인 선, 점, 색등이 지니는 고유한 상징적 가치사이에 엄격한 구분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칸딘스키는 회화에 있어서 예술가란 개인적이고 부정확한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어야 할 정서들을 표현하기 위해 수학만큼이나 엄밀한 보편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음직하다고 리드는 쓰고 있다.

리드가 지적하고 있듯 칸딘스키는 실제로 일체의 개인적인 연상들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있기를 원했고, 이러한 바램은 그로 하여금 개인적인 연상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어휘들을 구사하게끔 몰고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칸딘스키는 그러한 어휘들을 마침내 기하학이라는 비개인적인 언어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잃어버린 근원의 세계, 순수한 실재에로 회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이같은 시도들에는 어떤 순진한 꿈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것을 이상화하고 그것에 되돌아 가려는 시도란 결국 한 개체로서의 인간과 그가 추구하는것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거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잃어버린 직접성을 되찾으려고 하는 시도들에 특히 해당된다. 이유인즉, 개체화의 원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란 항상 어떤 개인의 시도이며, 따라서 부정되어야 할 그 개인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잃어버린 직접성과 같은 이상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실제로는 그러한 이상을 일으키는 것이 인간에게 결핍되어 있음을 폭로해 주는 일밖에 안된다. 예컨대, 고향에로의 회귀는 바로 고향의 상실에 의해서만 이상화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닌 사람들만이 어린 시절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좀더 근원적이요 직접적인 세계로 되돌아 가려는 예술가의 시도를 곧 회귀인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시도란 단지 그러한 회귀에 대한 꿈 이상의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꿈이 현실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다만 잘못된 신념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같은 입장에서 마크와 칸딘스키의 예술작품들이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의도된 것 즉 회귀 자체이기 보다는 의도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그들은 직접성에로의 회귀 자체와 회귀의 의도를 혼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귀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잃어버린 낙원을 대신해서 하나의 대용물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러한 사정은 추상적 형식주의의 경우나 다름이 없다. 우리는 그것이 바로 키취의 기본성격 임을 알아본 바 있다. 그러한 예술일 때, 예술작품이란 이 세계속에서 개인의 고립화에 대항할 힘이 부족한 사람들에 의해 향수됨직한 유사 종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고안된 단순한 기회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이같은 유혹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작가에 따라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원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추상적 형식주의는 정신의 자율성을 통해 구축된 대리실재를, 추상적 표현주의는 직접성의 자발성을 통해 회귀된 대리실재를 잃어버린 낙원인 것으로 대체시켜 놓고 있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양자 모두가 키취임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