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림
김구림, ‹질-62›, 1962
김구림의 1960년대 추상 작품은 크게 흑색조 또는 백색조 화면으로 나뉜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핵 1-62›, ‹태양의 죽음›(1964)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질-62›는 백색조의 배경이 특징적인 작품이다. 작가는 ‹질-62›를 통해 유화 물감과 불을 붙인 비닐이라는 생경한 재료의 조합으로 독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화면 구성을 선보였다. 특히 연소 과정에서 그을리고 수축된 비닐의 임의적이고 비정형적인 마띠에르가 돋보인다. 비닐은 조형을 위한 재료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주제 의식을 다층화한다. 본 작업 당시 작가가 비닐을 “문명의 산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표출된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의 전조를 찾아볼 수 있다.
김구림, ‹핵 1-62›, 1962
1950년대 한국 미술계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은 앵포르멜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김구림은 여타 앵포르멜 작가들과 달리 붓을 사용하지 않고 퍼포먼스와 같은 행위를 통해 비정형의 화면을 구축해냈다. 패널 위에 비닐을 바르고 불을 붙이면 석유가 붙은 부분이 타오르는데, 이때 담요 등을 이용해 불을 끄고 남은 흔적이 작품의 골조가 되었다. 작가는 이를 가리켜 “회화가 아닌 회화, 즉 그리지 않은 회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로 설명했다. ‹핵 1-62›는 1960년대 작가의 탈회화적인 제작 방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김구림은 ‹핵 1-62›의 제작 동기로 1950년대 작가가 경험한 전쟁의 참상과 충격, 청춘기의 불안정성을 회고한다. 흑색조의 화면과 그을린 비정형의 흔적은 작가 내면의 반영이었다. 혼란한 전후 시대에 침잠하는 한 개인으로서의 김구림과 동시에 시대에 반응하며 자신만의 표현 기법을 모색하고자 했던 작가로서의 김구림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