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이상적인 사회의 풍경을 그리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곡물 시장›

전시정보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곡물 시장(The Cereal Market in Pontoise)›(1893) 캔버스에 유채, 46.5x3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곡물 시장(The Cereal Market in Pontoise)›(1893)
캔버스에 유채, 46.5x3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화가이자 스승이었던 예술가 피사로의 이야기

카미유 피사로, ‹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with Hat)›(1903) 캔버스에 유채, 41x33cm, 런던 테이트 브리튼.

카미유 피사로, ‹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with Hat)›(1903)
캔버스에 유채, 41x33cm, 런던 테이트 브리튼.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총 8회에 걸쳐 개최된 인상주의 미술전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작가였을 정도로 이 미술 운동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다. 게다가 고갱(Paul Gauguin), 쇠라(Georges Seurat), 세잔(Paul Cézanne)과 같은 후배 작가들의 전시회 참여를 독려해 인상주의 미술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피사로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서뿐 아니라 무명의 젊은 작가들을 발굴해 지원했던 스승으로서도 현대미술사에 기여한 작가이다. 오늘은 화가이자 스승이었던 피사로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피사로는 캐리비아해 연안에 위치한 당시 덴마크의 식민지 세인트 토마스 섬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20대 중반인 1855년부터 파리에 정착해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아카데미 쉬스(Académie Suisse)에서 모네(Claude Monet)와 세잔 등 장차 인상주의 미술 운동을 함께 이끌어갈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파리 미술계에서의 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잘래 언덕(Jalais Hill, Pontoise)›(1867) 캔버스에 유채, 87x114.9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잘래 언덕(Jalais Hill, Pontoise)›(1867)
캔버스에 유채, 87x114.9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카미유 피사로,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비의 효과(Rue Saint-Honoré in the Afternoon, Effect of Rain)›(1897) 캔버스에 유채, 81x65cm,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카미유 피사로,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비의 효과
(Rue Saint-Honoré in the Afternoon, Effect of Rain)›(1897)
캔버스에 유채, 81x65cm,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던 시기의 피사로는 퐁투아즈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했는데, 이곳은 파리 근교의 소도시 중에서도 유독 근대화가 더디게 진행되던 시골 마을이었다. 피사로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퐁투아즈의 전원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해 그렸다. ‹퐁투아즈 곡물 시장›(1893)과 같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 풍경도 그가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였다. 피사로가 다른 인상주의 미술가들처럼 근대화된 파리의 풍경을 그린 것은 60대 후반에 접어든 1890년대 말이다. 그는 마차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파리 대로변의 낮과 밤, 봄과 겨울, 맑은 날과 비오는 날의 변화를 관찰해 연작으로 남겼다.

인상주의 미술전이 거듭되면서 모네나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와 같은 동료 작가들이 부와 명성을 얻게 된 것과 달리, 이 전시회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던 피사로는 1903년 74세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그와 같은 성공을 누리지 못했다. 작품 판매가 부진해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지만, 피사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주변 동료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고갱, 쇠라, 세잔, 고흐(Vincent van Gogh), 마티스(Henri Matisse) 같은 후배 작가들을 지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쇠라, 고흐, 세잔과의 인연을 좀 더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곡물 시장(The Cereal Market in Pontoise)›(1893) 캔버스에 유채, 46.5x3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곡물 시장(The Cereal Market in Pontoise)›(1893)
캔버스에 유채, 46.5x3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퐁투아즈 곡물 시장(The Cereal Market in Pontoise)› 확대 장면 ‹퐁투아즈 곡물 시장(The Cereal Market in Pontoise)›
확대 장면

‹퐁투아즈 곡물 시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알갱이처럼 보이는 점들을 연속적으로 찍어 색을 칠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채색법은 색채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뒤에 일일이 점을 찍듯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했던 신인상주의 그룹과 교류한 영향이다. 이 그룹은 인상주의 미술을 좀 더 과학적, 분석적으로 이어갈 것을 주장했던 후배 작가들로 구성되었고, 쇠라가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피사로는 자신보다 서른 살 가까이 어린 쇠라와 스스럼없이 교류하며 공동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동료들의 반대에도 그가 인상주의 미술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조르주 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1884~1886) 207.5x308.1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조르주 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1884~1886)
207.5x308.1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쇠라는 피사로의 도움으로 마지막 인상주의 미술전에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1884~1886)를 출품했다. 이 전시를 계기로 무명 작가였던 쇠라는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 작품은 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명작으로 남았다. 쇠라는 5년 후인 1891년 33세의 나이에 원인 미상의 병으로 사망했는데, 요절하기 전 그가 국제적인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피사로였던 셈이다.

고흐는 마지막 인상주의 미술전이 열리던 해인 1886년 고향인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로 왔다.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어두운 색채로 그렸던 네덜란드 시기의 작품과 달리 파리에서는 인상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채와 주제의 그림들을 주로 그렸는데, 고흐에게 인상주의 미술을 지도한 것이 바로 피사로였다.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고흐가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물도록 주선해주고 그에게 정신과 의사였던 가셰(Paul Gachet) 박사를 소개해준 것도 피사로였다. 고흐는 몇 달 뒤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피사로는 고흐가 불행한 삶을 마감하기 전 기꺼이 그의 조력자이자 친구가 돼주었다.

피사로는 아카데미 쉬스에서 알게 된 세잔을 퐁투아즈로 초대해 함께 작업하면서 그의 화풍을 변화시키는 멘토 역할을 했고, 세잔이 인상주의 미술전에 참여하며 점차 그의 활동 범위를 넓혀가도록 해주었다. 피사로가 작고한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세잔은 파리에서 회고전을 개최하며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전시의 도록에서 세잔은 자신을 ‘피사로의 제자’로 소개했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피사로에게서 나왔다”는 그의 언급은 파리 미술계에서 푸대접받던 자신을 아낌없이 도왔던 스승 피사로에게 보내는 최고의 헌사였다.

피사로가 도움을 주었던 다섯 명의 작가들은 모두 20세기 현대미술을 이끈 거장들로 성장했다. 고갱, 고흐, 세잔, 쇠라는 인상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20세기 현대미술을 견인한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로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마티스는 1905년 20세기의 첫 현대미술 운동으로 일컬어지는 야수주의 그룹을 이끌었고, 이후 현대미술의 거장이 되었다. 이 다섯 명의 작가들이 아직 무명이던 시절 이들의 재능을 알아본 피사로의 안목이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피사로 자신이 그다지 여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도 젊은 미술가들을 적극적으로 도운 점도 되새겨볼 만하다. 그는 나이와 출신의 차이를 뛰어넘어 다양한 예술가들이 공존하는 파리 미술계의 모습을 만들어가고자 했다. 그런 피사로에게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 풍경은 매력적인 주제였을 것이다. ‹퐁투아즈 곡물 시장›은 화가 피사로가 꿈꾸던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풍경을 보여준다. 다양한 이력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일 수 있도록 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도 이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유신 학예연구사

카카오톡 채널에 가입해 편리하게 소식을 받아보세요! 채널 추가하러 가기


소장품 더보기